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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_런런219

-생애 마지막 눈-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연필을 깎아낼 때마다 미덥지 않은 사각거리는 소리와 핏방울이 초침처럼 떨어졌다. 창문이 이따금씩 흔들렸다. 내일 더 추워질 거래. 이불을 더 사야겠다며 장 안을 살펴보고 와선 더 찬 손으로 손을 감싸쥐었었다. 담담한 지금에 와서도 그 때의 안타까움이 얇았던 네 옷자락을 기억한다. 두껍게 입어. 그러면 너는 그랬다. 곧 눈이 올 거야. 그게 다 해결할 것처럼. 그 해 겨울에는 비만 많이 내렸다.

 

 두꺼운 커튼이 있었는데. 짙은 회색 천으로 투박히 짜여진 큰 커튼이. 손 끝이 차가운 유리에 닿았다. 피가 유리 위에 엷게 맺혔다 투명하게 말라붙는다. 피가 나는구나. 아니다. 창 밖에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벌써 몇 년만에 눈이 온다.

 

 약을 바르는 게 맞는지. 수 번 베인 자국 위에 반투명한 연고를 문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서 손가락에 들이박는 튜브 입구가 상처를 벌린다. 연고에 붉은 색이 퍼졌다. 반창고 곽을 열어보자 말린 종이 포장만 가득했다. 반창고를 붙이지 않으면 연필에 묻어난다. 너는 연필을 잡고 꾹꾹 눌러쓰지 말라고 했다. 네가 뒤에서 지켜보는 와중에도 연필심이 계속 부러졌다. 그래도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었다. 눈을 두어 번 마주쳤던 것 같기도 하다. 손 끝 위 가득한 불그스름한 연고가 한 방울 흘러 떨어졌다. 너는 그래도 내가 쓰고 있는 글씨보다 내 손놀림을 더 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때도 손톱같은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좋아했던 같기도 했다. 나는 며칠 전에 검은 색으로 열 손톱을 물들였다. 아예 관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몇 번 더 창문이 철커덕거렸다. 눈발이 좀전보다 거세졌다. 한기가 더운 방으로 스며들었다. 책상 밑의 싸구려 온열기는 두 번 작은 불꽃을 토해내더니 얌전히 작동을 했었다. 야, 싸구려야. 더워. 발치의 온열기를 툭툭 차도 조절기능이 고장난 기계는 익숙하게 털털거리다 만다. 불 나겠다 싶었던 너는 그 해 가장 추웠던 날 그걸 결국 창고 안에 처박아버렸고 우리 둘 다 몇 년의 추위동안 잊고 살았다.

 

 햇볕에 발끝이 따스하다 느꼈던 봄날 아침 다시 그것이 생각이 났다. 고장난 그 온열기 있잖아. 잘 있을까. 그 말만 조금 하고선 아무도 먼지를 털고 전원을 켜보려 나서진 않았었다. 겨울은 오지 않을테니까. 맞잡은 손 위로 나뭇잎 그림자가 얕게 드리웠다.

 

 쓸모없는 것을 위해 창고 열쇠를 쥔 건 근, ···몇 년만이지. 두어 번의 시도 끝에 붉은 빛이 켜졌다. 구부정한 등에 냉기가 스쳤다. 코트를 껴입고 거리를 종종거리던 사람들 사이를 걸어와 거실 구석에 쪼그려앉아 흐릿한 글씨의 설명서를 읽는 사람이었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맞다. 혼자였다.

 

 내일도 한파가···. 아무 거나 끼워입은 점퍼의 주머니에서 간간히 끊기는 라디오 소리가 들려온다. 눈송이가 천천히 중력에 지고 있다. 너는 그런 표현을 좋아했었다. 이따금 바람이 샘을 내 눈꽃을 하늘 너머로 훔쳐가기도 한다. 따위의 생각을 할 때마다 머리 한 쪽이 영 아파왔다. 추워서인지. 피부가 감각을 잃는 건 새하얗고 아름다운 광경을 더 받아들이기 위함이라고, 그런 건 압도와 가까운 거라고, 네 모습이 네 세상이 흰 눈에 번져가고 있다고··· ···.

 

 이제 더 이상 눈을 볼 일이 없을 터였다.

 

 눈의 얘기를 투박한 연필심으로 쓰는 일도 그만두었다.

 

 내가 눈을 감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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